수필/산문

이름  
  임정수(작성일 : 2008/04/11, 조회 : 1763
제목  
 그녀는 출장중

그녀는 출장중 / 임정수




새벽부터 거래처를 다니느라 정신없이 뛰었더니 몸살이 날 지경이다.
몇 일 전부터 주문받았던 물품을 다 맞추어놓고
택배 기사에게 전화하여 보내기만 하면 다 된다.

오늘은 별로 할 일도 없고해서 사랑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문득 생각나서 전화를 한게 아니라
2, 3일 전부터 만나기로 미리 약속을 했었다.

서로가 자주 만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언제나 벼르고 별러야만 시간을 낼 수가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기 그지없다.

빨리 일을 마친다고 서둘렀는데도 벌써 오전 9시가 지났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 멀어서 얼른 서둘러야 한다.

옆가게에 배송할 물품을 부탁하고 집으로 가서 대충 샤워를 했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옷을 갈아입고 시계를 보니 10시가 지나 있었다.

요즘은 부지런히 설치는 데에도 왜 이렇게 시간이 잘 가는지를 모르겠다.
승용차로 갈지 기차로 갈지 잠시 망설이다가 기차로 가기로 정했다.

지금 이 시간에 승용차를 몰고 가노라면
가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얼른 다녀와야 하겠기에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나 아깝기 때문이다.

택시를 잡아타고 구포역으로 갔다.
옛날엔 시간마다 차편이 있어서 그렇게 기다리질 않아도 되었었는데,
요즘은 차편이 자주 없어서 마냥 기다려야 하는게 영 불편하다.

일만 바쁘지 않다면 하루 전에 미리 만나러 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자
실없는 웃음이 나온다.

예정된 시간에 기차가 도착했다.
기차로 여행을 가 본 지 얼마만인가.
좌석을 찾아 앉으니 안도의 함숨이 다 나오는 것이다.

이젠 이대로 앉아 있기만 하면 기차가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것이니
긴장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바쁜 중에도 급하게 서둘러서일까.
잠시 창밖을 내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무거워짐을 느끼는가 싶더니
어느새 단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목적지의 종착역을 알리는 스피커의 안내 방송을 들으며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급히 뛰어 나갔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내린 듯 싶다.

개찰구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역앞에는 이미 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왔어?"
"아까..."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괜찮아, 나도 시간 맞춰오느라 별로 안기다렸어.*^.^*"
"정말?"
"응..."
"어디로 간다고 하고 나온거야?"
"응, 출장..."
"출장? 나도 출장 중인데."
"하하하..."
"그럼, 우린 둘 다 출잘 중이네?"
"응, 하하하..."

"어디로 갈까?"
"글쎄..."
"글세?? 글세는 학교나 학원에서 학생들이 회비를 내는게 글세잖아."
"뭐? 호호호..."
"자기 뭐 먹을래?"
"몰라. 일단 여기에서 가까운 곳으로 한번 나가보자."
"그래."

우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으로 갔다.
"여긴 어디지?"
"어디긴, 시장이지."
"시장이었구나, 어쩐지 북적거리더라."
"칫..."
"뭐 살만한거라도 있어?"
"응...시장에 온김에 애들 옷이나 좀 살까싶어."
"알았어, 골라봐. 애들 옷은 내가 사줄께."
"자기가?"
"뭐, 어때?"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울릉도나 독도, 제주도는 있어도
우리나라 섬 중에 그래도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라."
"하하하..."

옷가게로 들어갔다.
디자인과 박음질 등을 꼼꼼히 체크하고 질감에 대해서 얘길 나누고 있으려니
옷 가게 주인여자가 잘 어울리는 부부라며 히죽히죽 웃는다.
'부부? 우리가 언제 부부였던가?'
하긴, 그렇게 오해를 받을 법도 했다.
나도 헷갈리는데 어찌 그사람인들 안헷갈렸을까.

옷을 살펴보던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다.
"엄마? 지금 출장 중이야. 이따가 3시 지나서 들어갈거야.
그래..알았어, 밥 챙겨먹고 티브이 보고 있어. 응..끊을께.."
"누구? 애들이야?"
"응, 오늘이 토요일이잖아."
"아참...그렇지."
그때 나의 핸드폰에서도 벨이 울렸다.
"네? 예...지금 재료 때문에 출장을 왔습니다. 들어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옷가게 주인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 두사람을 번갈아 본다.
전화를 끊고보니 나도 무안해지려고 한다.
'출장...그렇게 말하고 보니 조금 이상하긴 이상하다. ㅋㅋㅋ...'

꼭 직장엘 다니는 사람들만 출장을 다녀야 하나?
부부가 아닌 사람들이만난다고해서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아야만 하는걸까?
알고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옷가게 여주인이 어쩌면 출장을 핑계로 바람난 것으로 오해를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해서 일일이 변명을 하듯 설명할 수도 없지 않은가.
에라, 모르겠다.
우리가 하루 이틀 만나고 다녔던 것도 아니고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무엇이 무서워 고민할까.
그냥, 지금껏 살아온 대로 그렇게 살면 되는거지.

돌아오는 열차 속에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말그대로 임자있는 사람과 만나서 불륜을 저지른다면
그야말로 '남이 알면 남사, 내가 알면 우사'라 하겠지만,
우린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는데 괜한 생각으로 인상을 찌푸릴게 뭐있냐고...

조용한 객차내에서 핸드폰이 우렁찬 함성으로 울려대었다.
가게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네, 지금 출장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입니다."
무심결에 평상시의 목청으로 전화를 받았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 시키고 있었다.
'아차, 열차 안이라는 걸 깜빡 했었구나.'

괜히 조용한 객차 내에서 나로인해 소란을 피운듯 하여
미안하고 무안한 마음에 고개를 떨구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그녀와의 즐거웠던 하루를 되돌아 보는데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응, 자기야! 응..나도...앞으로도 출장을 자주 다녔으면 좋겠다.
자기도? 응...사랑해..."
내딴엔 조용히 통화를 하려고 조심했는데도 주위 사람들에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래도 좀 전에 전화를 받을 땐 출장에서 돌아가는 중이라고 해서
무언가 사업이 바쁘거나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스타일처럼 보였을 텐데,
지금 받은 전화에선 '응, 자기야! 이런 출장 자주 다녔으면 좋겠다'고 했으니
주위 사람들에겐 조금 한심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몇몇 사람들은 떫은 감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아닌가.
'에휴...좀 더 조심할걸...'

내 목소리가 그렇게 크지도 않은데,
달리는 열차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잘들렸던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젠 그녀와의 만남을 접어야 한다는 일종의 경고같은 것일까?
싫다.
그녀가 없는 삶은 한번도 생각해보질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그녀와 나는 하나로 생각하곤 했기 때문에
그런 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한쪽 손바닥으로 가려서 조용히 얘기했다.
"응...뭐? 다음 출장을 언제로 하면 좋겠냐고?
그건...자기가 알아서 정해야지."
'우와~미치고 환장하겠다.'
얼른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고대하면서
창밖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찌되었건 오늘 하루는 분명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괜히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비록 이러한 내 사정을 모르는 그녀이겠지만,
그녀를 생각하면 마냥 사랑스럽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자기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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