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산문

이름  
  임정수(작성일 : 2008/03/15, 조회 : 1773
제목  
 지리산에서

지리산에서 / 임정수



함박눈이 쌓이고, 쌓였던 눈이 다시 녹으면서
얼어버린 겨울의 빙판길을 달린다는 것은 정말이지 위험천만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겨울은 다른 때에는 구경할 수 조차도 없는
하얀눈과 바람과 겨울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그래서 겨울이 좋다.
언제나 겨울이 되면 포근해져오는 마음은 마냥 편안하기만 하다.

가끔은 곡예 운전으로 하얀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나의 승용차는
뜨끔거리는 짜릿한 전율과 스릴을 안겨다 주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더이상 자만하거나 교만해지면 안될 것이다.
지금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시한 폭탄을 가슴에 안고 달리는 것이기에..

열려진 차창으로 차가운 바람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순간 머릿속이 맑아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리산의 정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지리산 자락을 더듬는 음흉한 나의 눈길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산은 속세에 찌든 나의 온갖 찌꺼기들을 정화해내고 있다.

그렇다.
비어있으면 담아야 하고 가득 채웠으면 또다시 비워야 하질 않는가.

더이상 채울 것도 버릴 것도 없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난 여행길이기에
지리산 산행에서 작은 그릇에 넘치도록 담아가야 하겠다.

더이상 차가 오르지 못할 장소에 이르자 걸어서 오르기로 했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쌓인 눈길을 걸어보는 일이..

문득 군생활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도에서의 군생활을 통해 지겹도록 눈을 보고 치우며
평생 볼 눈을 그때에 다 보았노라 생각했었는데,
또다시 쌓인 눈속을 걸으니 군생활의 추억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쌓인 눈속을 헤치고 몇시간을 걸었을까.
계곡 저편에서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놀란 나무들이 몸서리치듯 떠는 것이 아닌가.

소리(인기척)가 나는 곳으로 향해 걸었다.
어차피 목표를 정하고 오르는 산행이 아니었기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나도 모르게 발길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눈쌓인 계곡 아래에서 누군가가 알몸으로 얼음을 깨고 들어가 수련(?)중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조용히 다가갔다.

"시원하지요?"
"네,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옆으로 오라며 권한다.

나도 얼른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첨엔 물이 차가워도 막상 얼음물 속으로 들어가보면
바깥엔 찬바람이 얼음을 스치고 전신을 파고들어서 무척 춥다는 생각이 들어도
물속(안)은 생각보단 따뜻하기까지해서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냉수마찰이나 찬물 목욕도 해본 사람만이 그 기분을 알 것이다.

이열치열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더위는 더위로 이긴다는 말처럼 겨울을 추위로 이긴다는...

손자병법에도 나와있지 않을 것만 같은 이한치한 푸하하하...
온갖 생각이 다 들었지만 마음만은 이다지도 편안할 수가 없다.

너무나 좋다.
이래서 더욱 야인으로 돌아가 살고픈 마음이 생기는 것인가 보다.

졸졸졸 소리를 내며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감상하고 있으려니
물밖으로 나간 수련자(?)께서 나무가지에 맺힌 고드름을 하나 떼어서 들고온다.

그것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세찬 바람에 얼어서 고드름처럼 생긴 것이다.

"자, 이것을 한번 드셔보시오."
"네, 감사합니다."

한입 깨물어 먹었더니 가슴 속까지 후련해진다.
겨울에 겨울을 먹는 기분이랄까.
정말 시원했다.

이곳에서 살았으면...
이대로 시간이 정지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이대로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생각은
어느새 기도가 되어 지리산 가득히 메아리 치는 것만 같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머니의 품속 같은 지리산은 나를 포근히 감싸주는 것만 같다.
이곳에 눌러 앉으면 내가 신선이 되는 것은 아닐까.

먼저온 수련자가 그만 하산하자고 한다.
가기가 싫었다.
지금 이 기분을 깨기가 싫었다.
조금만 더...이대로 있고 싶었다.

다정히 품어주는 지리산의 정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아쉽지만 어둠이 내리는 지리산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넘치도록 가득 채워진 그릇에 지리산의 맑은 정기를 함께 담고 왔다.


- 2007년 겨울 지리산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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