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산문

이름  
  임정수(작성일 : 2007/05/25, 조회 : 2589
제목  
 잠깐!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2008년 겨울호 대한 문학 세계 수필과 소설 산책)

잠깐!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 임정수




참으로 오랫만에 태종대로 갔다.
태종대는 부산의 영도에 위치해있다.
영도는 영도 대교와 자살 바위로 유명하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까지만 해도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쯤이던가?
일주일에 한차례씩 영도 대교의 교각이 들어올려지면 큰 배들이
그 시각에 맞추어 지나가곤 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옛부터 부산이라고 하면 해운대와 자갈치 시장 말고도 영도 대교와 자살 바위가 유명했었다.
지금의 자갈치 시장이 있는 곳엔 자갈이 많이 깔려 있었고,
부산 앞바다에선 갈치가 많이 잡혀서 자갈치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오늘은 나의 애마(승용차)를 놔두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며 영도로 갔다.
애마를 타고 가면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기에
오늘만큼은 곳곳의 명소도 둘러볼겸 천천히 다녀오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선 것이다.

태종대 아랫길에서 부터 정상까지 다니는 차들은 많았지만,
시상을 떠올리며 시심도 건질겸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연인들끼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껴안고 다니는 모습들이 눈에 띄기도 하고
혹시라도 나처럼 혼자서 오르는 사람이 있을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만치에서 홀로 걸어가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그녀는 뒷모습만 보아도 첫눈에 사랑스러웠다.
기대반 설레임 반으로 조금씩 거리를 좁히며 다가갔다.
쭉빠진 몸매와 반듯한 이목구비를 보니 한눈에도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여인이랑 반나절이라도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더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홀로 태종대를 오르는 저 여인...
저정도 인물이면 수 많은 남자들이 따를 듯도 한데 무슨 사연이 있어 보이기도하다.
무슨 사연일까?

여인에 대한 추측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불현듯 자살 바위에 얽힌 사연이 떠오른다.
자살바위...

태종대엔 자살 바위가 있고,
그곳에 오르면 누구든 자살하기에 딱 좋은 장소라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부산 시에선 자살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올라가는 곳곳에 푯말을 세워두었다.
다시 한번 더 생각을 해보고 마음을 고쳐 먹으라는 뜻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는 일마다 안되고 도저히 되는 일이 없어서
더이상 살아갈 낙이 없어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강이나 바다에 빠져 죽자니 숨이 차서 고통을 당하다 죽게 될 것이 두려웠고,
약이나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자니 몹시 갑갑하고 숨이 막힐 것 같아
이왕이면 한번에 죽을 수 있는 장소를 찾다보니 태종대까지 올라오게 된 것이다.

어차피 죽으려고 결심을 하고 오르는 사람인데 무슨 생각이 있을까.
아무 생각도 없이 오르고 또 올랐다.
이윽고 자살 바위에 도달한 그사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나온 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비록 힘들고 어려우며 없는 형편이었지만,
가족들과 오손도손 정겹게 살던 때를 생각하니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고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죽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자,
이렇게 죽을 각오라면 무었을 못하랴...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마음을 고쳐먹고 하산하기로 했다.

상쾌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니
온세상이 자신의 것으로만 생각되었고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천천히 내려오는 길에 이것저것 눈에 띄는 것은 왜그리도 많은지...
여기저기에 세워진 푯말이 눈에 띄었다.

무슨 글일까?
호기심에 다가가 자세히 보니,
'잠깐!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이다.

어차피 죽으려고 왔던 자신이었기에 가진 거라곤 시간밖에 없었고
다시 한번 더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어 자살을 하려고 왔었다는 생각에
"그래, 내가 죽으려고 왔었지."
그러면서 도로 올라가 뛰어 내렸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어쩌면 이 여인도...
그냥 관광차 구경을 온 사람이거나
시련을 당하여 정말 자살 바위를 찾아온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어쨌거나 제대로 작업이나 걸어보자는 심사로 거리를 더욱 좁혀갔다.

두어걸음정도까지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여인이 기다렸다는 듯 돌아보며 피식 웃으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와예? 내한테 반했능교?"
"예..반했심니더."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보며 큰소리로 웃었다.
나는 올라가는 내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이것이 정녕 꿈이라면 깨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전망대가 있는 휴게소에 도착하니 커피를 마시자고 한다.
커피...
나야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마는 사람이라 어떤 커피가 좋은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원두 커피를 주문했고, 나도 마땅히 눈에 띄는 게 없어서 같은 걸로 주문했다.
평소에는 한가하게 앉아서 먹을 시간이 없어서인지 자판기 커피를 즐겨마시는 편이지만,
원두 커피를 주문하고 보니 한잔에 칠천원이란다.

드넓은 바다를 내려다 보며 슬쩍 여인을 훔쳐보니 정말 이쁘긴 이쁘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마네킹을 보고있는 느낌이다.
이런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원두 커피를 두잔 더 주문해서 밖으로 들고왔다.
자살바위로 가려면 전망대 밑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밖으로 나와 그녀와 함께 자살 바위로 내려갔다.
정말 경치가 좋은 게 누구든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라면 꼭 알맞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살 바위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고,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우리 두손을 꼭 잡고...한번 뛰어내려가 볼랍니꺼?"
"예? 미쳤어예. 뛸려면 혼자서 뛰지, 뭐하러 같이 뛰자고 합니꺼."
얘길 들어보니 죽으려고 온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한동안 그녀와 너울대는 파도를 보며 서있었다.
'지금 이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쓸데없는 잡념으로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가지만,
나는 오로지 그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녀가 두리번 거리더니 저만치 앞서서 한참을 내려간다.
그리곤 푯말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빤히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왔지만,
그럴 리는 없을 거라 생각하며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곧바로 하산할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나를 본 척 만 척하며 도로 올라간다.
얼른 뛰어서 따라가며,
"와예? 뛰어내릴라꼬예?"
"언지예. 아까 커피 주문할 때 잔돈을 덜 받았다 아임니꺼"
"예? 하하하..."
"호호호..."

'지금쯤 그녀는 무얼하고 있을까?'
인천에서 산다는 그녀는 그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녀가 가르쳐 준 전화번호를 만지작 거리며 애궃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린다.

그녀가 보고싶고 이쁜 목소릴 듣고 싶어도 차마 번호를 누르진 못한다.
그녀가 아닌 다른 여인이 나를 방해할까봐 더욱 못하는 것이다.
언젠가 미치도록 그녀가 그리워서 몇번이나 망설인 끝에 겨우 용기를 내었지만,
수화기에선 아리따우면서도 엉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거신 전화 번호는 없는 국번이거나 잘못된 번호이오니 다시 한번 확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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