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산문

이름  
  임정수(작성일 : 2007/06/12, 조회 : 2672
제목  
 흰 고무신의 추억

흰 고무신의 추억 / 임정수



내가 특공 부대에서 근무하다 춘천 0 0 여단으로 전출을 갔던 때가 88년도 후반이었으니 91년도 3월 쯤으로 기억된다.
91 팀스피리트 훈련 중에 겪었던 등골이 오싹한 얘기를 하나 할까 한다.

충북으로 훈련을 갔을 때이다.
숙영지 내의 유선망과 무선망을 완벽하게 개통하고서,
숙영지에 주둔하게 될 통신병들의 안전 사고 예방 교육을 실시하고 본부 중대장에게 통신병 관리를 부탁하고,
중계소를 운영할 통신병들을 인솔해서 가창산 819 고지를 향해 떠났다.
사전에 지형정찰을 통해 훈련 기간 동안 마실 물을 확보하고 중계소의 위치도 봐두었으므로,
수북히 쌓인 눈 속에서도 헤매지 않고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추위와 비바람에도 견딜 수 있도록 중계소를 설치하고 완벽하게 위장하였다.
우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0 0 사단의 통신대에서 통신 장교와 통신병 몇이서
중계소를 운영하기 위해 올라와 있었다.
서로 통성명을 하며 이번 팀스피리트 기간 동안 멋지고 성공적인 훈련을 마칠 수 있도록 잘해보자고 다짐하며
힘찬 파이팅을 외쳤다.

3월의 햇살은 짧기만 하여 무선 교신 상태를 점검하고 서둘러 저녁 식사를 마쳤다.
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산은 서서히 고요함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가끔은 흩날리는 눈발이 시리도록 차가운 냉소를 머금기도 해서 자주 옷깃을 여밀 수 밖에 없었다.

어둠이 짙게 드리워지면서 내부를 밝히는 꼬마 전구가 거친 바람의 숨소리에 춤을 추었다.
평소 훈련 때마다 준비 해오던 P-77 무전기의 폐밧데리에 남아있는 잔류 전류를 이용하여
재활용하는 차원에서 고안 해낸 것이다.

갑자기 침묵을 깨고 숙영지에서부터 나를 찾는 호출음이 들려온다.
본부 중대장이 무전기 앞에 앉았던 모양이다.
중계소를 지나 숙영지로 복귀하는 전투 중대의 차량이 중계소 밑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다.
통신병들에게 교대로 상황 대기를 잘하라고 일러놓고 하산했다.
통신병 한명이 뒤따라 나오며 나를 부른다.
뒤돌아 보니 후라쉬를 들고 가라며 건네는 것이다.
필요없다고 했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 본다.
그래서 군 생활을 통해 터득한 비법을 하나 알려줬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툭 치면 눈에서 불이 번쩍거리는데,
그 순간을 놓히지 않고 한걸음씩 발걸음을 내딛이면 걸을 수가 있고,
양손으로 번갈아 가며 내려가면 뛰어서도 갈 수가 있다고 했더니 큰 소리로 웃는다.
지금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즘 한창 유행하는 <마빡이>가 나로 인해서 히트를 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말이다.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3중대 선임하사인 정 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숙영지로부터 교신하는 내용을 들었는데, 어떻게 빨리 내려올 수가 있냐고 묻는다.
비료 포대를 타고서 미끄럼을 타며 내려왔다고 하니까 못믿겠다는 듯 웃는다.
내려오다가 토끼도 같이 미끄럼을 타자고 바로 옆에서 미끄러져 내려오길래
잽싸게 잡았다면서 살아있는 산토끼를 정하사에게 내밀었다.

숙영지에서 다시 한번 더 유선망과 무선망을 확인하고 여유분의 장비를 점검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중계소로 올라가게 되었다.
숙영지로 돌아올 때에 선탑자가 없었지만,
다음 날 내가 선탑해서 숙영지로 한번 더 오기로 하고 4분의 5톤 운전병을 깨워 함께 중계소로 향했다.

가창산으로 접어 들었을 때, 쌓인 눈이 얼면서 비포장 도로가 조금 미끄러웠다.
늦게 도착해도 좋으니 천천히 서행 운전으로 가자고 했다.
얼마 쯤 가다 보니 저 앞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손을 흔든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사람이 지나다닐리가 없는데 정말 이상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받으니 하얀 여자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입가엔 흘러내린 핏자욱처럼 선명한 그 무엇이 있었다.
잠깐 세우라고 했더니 겁을 먹은 운전병은 그냥 달리기 시작했고,
슬쩍 옆을 돌아보니 화장끼없는 여자의 얼굴이 더욱 크게 보이는 것이다.

차를 왜 세우질 않았냐고 물으니, 겁이나서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고 한다.
하긴...나 역시 겁이 나는 건 마찬가지인데 운전대를 잡은 운전병은 말할 것도 없었으리라.
조금 더 가다보니 방금 지나쳐 온 여자인 듯한 사람이 또 저만치에서 손을 흔들며 서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한번도 아니고 어떻게 똑같은 모습으로 저렇게 손을 흔들고 서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귀신은 발이 보이질 않는다'는 말을 운전병에게 들려주곤 이번에도 천천히 가라고 했다.

눈부신 헤드라이트의 밝은 불빛에 드러나는 여자의 발은 보이질 않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천천히 훑어 보았다.
푸른 색인지 하얀 색인지 분간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한복을 입은 여자였다.
요즘은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드물지 않는가.
한 손엔 묵직해 보이는 보따리까지 들고 있었다.
여자의 손에 들려진 보따리를 본 운전병이 보따리 얘기를 한다.
내가 사람 머리일 것 같다고 하자, 이번에도 겁을 먹고 그냥 지나치려 하는 것이다.
여자의 옆을 지나치자 큰 소리로 세워보라고 하자,
차는 십여미터를 더 달리다가 서서히 정차했다.

빽미러로 뒤를 관찰해보니 서서히 다가오는 여자는 일반 사람이 뛰어오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전설의 고향에서 나오는 장면 그대로 그냥 서 있는 채로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더 여자의 발을 관찰했다.
발이 보이질 않았다.
겁먹은 운전병은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고, 나는 계속 뒤를 주시했다.

유리창을 조금 열었더니 찬바람이 들어오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수석으로 가까이 다가온 여자는 산 너머에 사는 사람이라며 좀 태워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나이는 50대 후반은 훨씬 넘었음직한 여자였다.
아무리 봐도 사람다운 구석은 찾아 볼 수가 없을 정도였지만, 망설일 것도 없이 타라고 했다.
나는 일부러 손을 내밀어 여자가 차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줬고,
여자는 내 손을 붙잡으며 차 안으로 올라왔다.
그순간 밑을 보니 여잔 분명히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게 아닌가.

여자는 내 옆으로 바싹 다가 앉았다.
손이 무척 따뜻하다고 생각하며 옆으로 바싹 다가앉는 여자의 허벅지 살의 감각이 느껴진다.
분명 사람이었다.
나는 좀 전의 상황을 얘기했고,
그 여자는 한참을 웃더니 자신에 대해서 얘기했다.

자신은 산너머에 사는 사람인데,
친척의 제사를 모시러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교통이 불편하다 보니 이곳에선 걸어다니는 게 보통이고,
하루 종일 음식을 장만하며 부엌일을 했더니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 줄도 몰랐다는 것이다.
또한 발이 보이질 않았던 것은 한복을 입으면 원래 잘 보이질 않는데다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쌓여있으니 보이질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산길이고 꼬불꼬불한 길이다 보니 우리가 천천히 달려서,
지름길로 곧장 와서 손을 흔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똑 같은 사람이 손을 흔드는 수 밖에...

듣고보니 섣불리 짐작한 나자신이 부끄러웠다.
제사 음식을 조금 싸가지고 가는 길이라며 보따리를 풀어 조금 덜어준다.
우리의 목적지는 산정상까지만 가면 되지만,
이렇게 추운 날씨에 아주머닐 혼자서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나도 그랬지만 운전병 역시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산너머 마을까지 함께 가기로 했다.

마을에 도착했다.
사실은 아주머니의 집앞까지 차로 갔지만...
아주머니의 아들도 추운 겨울에 군대에서 고생을 많이했다며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한다.
무슨일일까 싶어 기다렸더니 조그만 바께스에다 김치를 가득 담아오는 것이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의 한사람으로써 민폐를 끼치면 안된다고 했더니,
자식같아서 주는 것이라며 반찬이라도 해서 먹으라고 기어이 전해 주는 것이다.

우린 차 속에 있던 건빵 대여섯 봉지를 아주머니께 전해드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내려갈 때와는 달리 올라가는 길은 무척 미끄러웠지만,
꼭 뒤에서 누군가가 차를 밀어주는 듯한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한번씩 차가 미끌린다고 생각이 들었을 땐 앞쪽에 흰 고무신 한짝이 보이곤 했다.
친구들과 등산을 할 때에 지팡이를 짚고 올라가거나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올라가는 느낌이 아니고,
가만히 서 있어도 누군가가 등을 떠밀며 밀어주는 것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눈길에 흰고무신이 보일리가 없었는데 선명하게 보이는 게 이상하긴 했었지만,
어쩌면 제사 때에 참석한 영가가 고마움의 표시로 우릴 안전하게 산정상까지 인도해 주는 것일런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 도착한 우린 차를 한쪽에 세워두고 중계소가 있는 곳으로 또다시 걸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누군가가 우릴 뒤에서 받쳐주고 밀어주는 듯한 편안한 느낌으로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중계소에까지 도착할 수가 있었다.
중계소로 올라가는 동안 두어번 더 흰고무신이 보였다 사라지곤 했었지만 말이다.

아주머니께서 챙겨주신 제사 음식과 김치를 정리했다.
바께스를 열어보니 그 속엔 봉지 라면도 대여섯봉지가 들어있었다.
다들 출출하던 참이었기에 반합에다 김치를 넣어 라면을 끓여먹었다.
피곤했던 하루였기에 교대로 무전 대기를 할 수 있도록 상황병을 남겨둔 채
다들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흰고무신이 안내하는 깊은 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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