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산문

이름  
  임정수(작성일 : 2008/12/04, 조회 : 2083
제목  
 정화조 청소하는 날

정화조 청소하는 날 / 임정수




"계십니까, 계세요?"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 낯선 아저씨들의 굵직한 음성이 아침부터 요란하게 들려온다.
무슨 일인가싶어 호기심어린 마음에 현관문을 열고 삐죽히 고개를 내밀었다.
마침 우리집 대문으로 들어오는 아저씨와 눈길이 마주쳤다.

"화장실 펄려구요, 마침 집에 계셨네?"
"아,예...수고가 많으십니다."
"좀있다 저 앞집부터 정화조를 펄 것입니다."
"예..."
오늘은 일 년에 한 번씩 정화조를 청소하는 날이다.

집집마다 정화조의 용량이 다 다르겠지만, 우리집 정화조는 2톤짜리이다.
옛날집들은 보통 1톤짜리가 많은데 다행스럽게도 우리집은 2톤짜리라서 신경이 덜 쓰인다.
왜냐하면 요즘은 예전처럼 수시로 정화조를 청소하는 게 아니라
일년에 한번씩 지정된 기간내에 동네마다 몰아서 청소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식당을 운영할 땐 식당의 영업 허가를 내더라도
정화조의 용량에 따라 허가가 나고 안나고의 판가름이 났었기 때문에
정화조 부분에 대해서라면 신경이 날카롭기도 하는게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일반적인 식당의 영업 허가를 받아낼려고 해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화조의 용량이 최소한 15인분 이상이 되어야만 영업 허가를 내어주므로
이 분야에 대해선 그런대로 잘 알고 있는 셈이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타고 소리없는 향기가 전해져 온다.
이렇게 진한 향기를 맡고 있노라니 어릴 적 즐겨다니던 동네의 공중 변소와
퍼세식이었던 우리집의 재래식 화장실이 떠오른다.

골목을 누비고 다닐적엔 넘쳐나는 인분과 구더기로 인해 곤욕을 치르기도 했었고
날짜별, 요일별로 동네마다 행사아닌 행사가 있는 날이면
정말이지 지옥과도 같이 생생한 현장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 행사는 다름아닌 쥐덫을 놓거나 쥐약을 놓아서 쥐를 잡는 쥐잡기 날이 있었으며
재래식 변소의 구더기를 퇴치하기 위한 석유와 폐유, 석회가루 등을
화장실에 뿌리는 날이 있었기에 그날만 되면 항상 골머리를 앓아야 했었다.

지금은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어서
화장실 안에서 밥을 먹어도 될 정도로 악취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아 좋다.

가끔 수행을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 퍼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게 되는데
지금처럼 추운 날씨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덩어리(?)의 냄새를 맡노라면
어릴 적부터 맡아오던 친밀감이 떠올라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냄새가 그렇게 구수하고 좋을 수가 없다.

남자인 내가 끓인 커피 맛이 어떠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름대로 정성들여 내어 갔더니 반가운 마음에 고맙다고들 하시며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작은 정성이나마 보람이 있는 것 같아 나역시 기분이 좋았다.

사실, 나는 커피의 본 맛을 모른다.
그저 시골의 다방 커피라고나할까.
설탕을 많이 타서 단맛에 먹는 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나마 안심이 되는 건 청소를 하시는 분들이 다들 예순은 넘기신 분들이다.
그래서 내가 끓인 커피맛이 입에들 맛다고 하시는 것 같다.
이럴땐 평소에 즐겨먹던 나만의 커피가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다.

요즘은 프리마를 빼고 블랙으로 마시려고 노력하지만
아직까진 제대로된 커피 맛을 모르겠다.

"요즘 사람들은 집안에 있으면서 문을 잘 열어주지도 않고
우리처럼 정화조 청소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이유로
코를 막고 인상을 찡그리며 말도 잘 안하고 관심도 가지려 하질 않는데...정말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다들 다르지만,
알고보면 다들 비슷비슷하게들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걸어잠근 문처럼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에 정이 메마르고
참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죠."

"우리도 정화조 청소하느라 이집,저집...집집마다 돌아다니다 보면
조금이라도 가졌다 하면 벽부터 높히 쌓아놓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 집에는 높은 담장만큼이나 누군가가 집을 떠메고 가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하루라도 마음 편히 잠을 자질 못할 것 같더라구요."

사람들이 없이 살다가 조금만 번듯한 집으로 가서 살게되면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하는지
아님, 꼴에 있는 척들을 하는 것인지 스스로 담을 쌓고
세상과는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은 세상 인심을 말씀하시던 아저씨의 말씀이
한동안 귓가를 맴돌았다.

사실 그렇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함께 어울리고 살아가는게 우리네 세상살이가 아니던가.
내가 어릴 적 까지만 해도 이웃간에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으며 살았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으니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다.

길거리에 앉아 좌판을 벌이고 장사를 하시는 아주머니들이나
남들이 꺼려하는 정화조 청소를 하시는 이 아저씨들도 알고보면
번듯한 집을 가지고 있으며 자식들 또한 장성하여 판,검사 부럽지 않게들 살고 계실 것이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서 아무렇게나 판단 해버리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단지, 남들이 하지않는 험하고 냄새나는 일을 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한잔의 커피로 생생내듯 인심을 쓴 듯한 나이지만
나는 아주 사소하면서도 인간적인 걸 무척 좋아하기에
이렇게 오늘 하루도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바람처럼 스쳐 지나는 것에도 소중한 인연을 담아내는 마음으로
닫혀진 마음의 빗장을 열어제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면서 자신을 가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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