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산문

이름  
  임정수(작성일 : 2006/08/22, 조회 : 2079
제목  
 < 낙원을 꿈꾸며 >- 1. 혜미

정재는 서둘러 장비를 챙겼다. 요즘처럼 일거리가 없을 땐 남들보다 더 빨리 뛰어다니며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다. 첨엔 전기 기술자로써 옥내 전기 배선이나 가전 제품을 수리했는데, IMF를 맞으면서 그 마저도 어렵게 된 것이다.
그래서 수도 배관이나 옥상 방수, 보일러 설비 등, 닥치는대로 하다 보니 만능 기술자가 되어버렸다. 하긴, 자고 일어나면 변하는 세상인데 한가지 기술만으론 먹고 살기가 힘드는 세상이 아니던가.
정재의 아내는 조그마한 통닭집을 운영하고 있다. 시간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서 배달을 하고 있지만, 야간엔 주로 정재가 배달을 한다.
통닭집도 옛날과는 달라서 저마다의 브랜드를 가지고 수 많은 이름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난립하고 있다. 다행히 정재의 아내가 개발한 양념이 특이하게도 맛있어 제법 잘 팔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재가 일거리가 없어 공치는 날에는 아내의 덕을 많이 보게 되는 것이다.
결혼 초에는 평생 손에 물 한방울 안묻히고 행복하게 해줄 자신감만큼은 대단했었는데, 살다보니 자신감으론 배를 곯기 딱 좋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비록 처가집에 손을 벌리는 건 아니지만, 모아 둔 자금도 없이 빈손으로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기에 여러모로 아내의 도움을 받게되어 정재로선 하루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어느새 차는 아파트 정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빈 자리에 주차를 시켜놓고 장비를 끄내었다.
" 오늘도 수리를 하시게? "
경비로 근무하는 김씨 아저씨가 지나가다 정재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건넨다.
" 예, 안녕하세요? "
" 젊은 사람이 참 부지런도하구먼. "
" 예, 연락 받고 또 왔습니다. "
" 이따 끝나고 잠시 들러게, 차라도 같이 한잔하세. "
" 예, 감사합니다. 어르신, 꼭 들러겠습니다. "
정재는 소맷자락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발을 옮기었다. 딱 벌어진 어깨위의 걸쳐진 작업복에도 땀이 배어 얼룩져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며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 누구세요? "
" 예, 수도 배관공입니다. "
여자가 문을 열었다.
" 어서오세요, 화장실에 물이 잘 안내려가네요. 좀 봐주세요. "
" 예, 알겠습니다. "
" 세면대랑 바닥에 물 내려가는 곳도 좀 봐주세요. "
" 예... "
여자가 화장실의 스위치를 켰다. 그러나 불이 들어오질 않았다.
" 불이 켜졌다 꺼졌다 정말 말썽이네요. "
" 아, 그래요? 제가 한번 볼께요. "
정재가 스위치를 몇번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스위치의 접촉 불량인 것 같았다.
" 스위치가 고장이네요. "
" 예? 그럼, 새걸로 바꾸어야 하나요? "
" 예, 아무래도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
" 그럼..어떡하죠? "
" 잠시만요. "
연장통을 열어서 비슷한 스위치를 끄내어 맞춰본다. 이런 일을 하다보면 이것저것 많이 필요해서 항상 여유분의 부속품들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 이걸로 바꾸면 되겠네요. "
" 예..잘 좀 해주세요. "
고장난 스위치를 뜯고 새걸로 바꾸었다. 몇번 작동을 해보니 잘 켜진다.
" 수도 배관만 하시는 줄 알았더니 전기도 잘 보시네요? "
" 허허허, 원래 전공이 전기입니다. "
" 그래요? 대단하시네요. "
이미 세면대엔 물이 고여 있었지만, 수도를 틀어 본다. 꽉 막혀 있으므로 물이 내려 갈리가 없었다. 세면대 밑의 배관을 풀었다. 그사이 여자는 주방으로 가더니 무얼하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 더운데 이거라도 드시고 하세요. "
" 아이구, 고맙습니다. "
시원한 쥬스를 마시며 여자에게 말을 건넨다. 배수관이 잘 막히는 이유는요... 비누가 미끌려 들어가면 막히기도 하지만, 주로 머리를 감다가 머리카락이 뭉쳐있어서 막히는 게 대부분이더군요.
" 아, 그렇겠네요. "
" 변기통이 막히는 이유는 한가지이지만... "
" 예? 그게 무엇이에요? "
무척 궁금하다는 듯이 여자는 정제를 바라보며 묻는다.
" 허허허, 한번 생각해보세요. 화장지야 물에 들어가면 어느정도 풀려서 물살에 내려가지만요, 여자들이 사용하는 생리대는 풀리질 않고 그대로이니까 재빨리 건져내지 않고 그냥 물을 내리게 되면 막히게 되잖아요. "
" 호호호... "
듣고보니 무안한지 여자의 얼굴이 빨개진다.
" 이젠 다 되었습니다. 한번 보세요. "
정재가 세면대의 물을 틀어보고 물통에 받아놓은 물을 바닥에 부었다. 잘 내려간다.
" 수고하셨어요. "
" 다른 데 이상이 있는 곳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온김에 다 봐드리고 갈께요. "
" 그럼...씽크대도 좀 봐주시겠어요? "
" 예, 그러죠. "
씽크대의 물을 틀고 살펴봤다. 자주 청소를 하는지 깔끔하고 물도 잘 빠진다.
" 평소에 관리를 잘 하시는지 씽크대는 괜찮군요. "
관리를 잘 한다는 말에 여자는 은근히 기분이 좋다.
" 혹시라도 현관 열쇠를 잃어버려 난처한 일이 생기면 연락주세요. 곧바로 달려올께요. "
" 그런 일도 하시나요? "
" 예, 요즘은 한가지 기술만으론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요. "
" 예, 수고하셨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
정재는 경비실로 갔다.
" 이제 오는가? 기다리고 있었네. "
" 괜히 저 때문에 귀찮게 해드리는 건 아닌지요? "
" 아닐세, 나도 심심하던 차에 잘되었네 그려. "
김씨 아저씨가 커피를 타서 정재에게 권한다.
" 예, 잘 먹겠습니다. "
" 매번 신세만 지고 언제 다 갚고 갈런지... "
" 아닙니다. 신세라뇨. "
김씨 아저씨는 담배를 한대 물었다. 길게 빨아 들이킨 연기는 송두리채 삼켰다가 큰 숨에 섞여 뿌옇게 흩어졌다.
" 자넨 술, 담배도 안하니 무슨 낙으로 사는가? "
" 그야, 악착같이 돈모으는 낙으로 사는거죠. "
" 하하하, 말도 재미있게 하는구먼. "
김씨 아저씨의 처지를 잘 아는 정재는 다급한 연락이 올 때까지 그의 말동무가 되어 함께 있었다.
" 얼른 가봐야겠구먼. "
" 네, 차 문을 열어달라네요. "
" 그려, 어서 가보게, 부지런히 뛰어야지. "
" 네, 또 오겠습니다. 커피 잘 마시고 갑니다. "
정재는 김씨 아저씨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걸 보며 애써 모른채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젊었을 때 여기저기 세상을 떠돌며 술과 계집질로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나이들고 병드니 가족들로부터 외면을 당해 갈 곳이 없던 김씨 아저씨에게 어렵사리 아파트 경비 일이라도 구할 수 있었던 건 정재의 덕이 컸기 때문이다.
서둘러 현장에 도착하니 이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차문을 열지못해 발을 동동거리며 있었다. 짧은 미니 스커트 차림이라 아슬아슬한 모습에 길가던 사람들이 히히덕 거리거나 혀를 차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곤했다.
" 연락받고 왔습니다. "
" 아저씨, 어서 좀 열어주세요. "
문을 열 수 없어 애태우던 여자는 지나가던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정재는 철사를 끄내어 몇번 긁적이더니 금새 문을 열었다.
" 이야, 아저씨 정말 기술 좋다. "
정재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여자는 얼른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다리가 무척 이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재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여자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정재를 올려다보며 슬쩍 다리를 벌리고 웃는다. 순간 정재는 당황스러웠으나 어떻게 말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그냥 내려다보고 있었다.
" 어때요? "
" 좋네요. "
" 가지실래요? "
" 그러면 좋죠. "
여자는 명함을 꺼내더니 이만원과 함께 정재에게 건넨다.
" 생각있음 연락주세요. "
" 네...그럴께요. "
얼떨결에 명함을 받아들었지만 별 희안한 여자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운영하는 통닭집으로 들어서니 생닭을 자르는 칼질 소리가 크게 들린다. 아내가 돌아다 보며 정재를 맞이한다.
" 이제 와요? "
" 응, 힘들지? "
" 아뇨, 별로 힘들지 않아요. "
정재는 아내의 뒤로가서 가볍게 껴안는다. 아내는 칼질하던 손을 멈춘다. 뒤에서 껴안은채로 키스를 했다.
" 아이, 이이가 대낮부터 왜 이래요? "
그다지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지만 누가 들어오기라도 할까봐 출입문을 바라보며 가볍게 뿌리친다.
" 가만히 있어봐, 내가 안마를 해줄께. "
정재는 아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어깨를 주무른다. 너무 세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정재의 손길에 온몸이 시원해짐을 느낀다.
" 사랑해. "
" 너무 좋아요, 너무 너무 행복해요. "
정재의 손길을 느끼며 잠시 행복감에 도취해있던 아내는 정신이 번쩍드는지 정재를 뿌리친다.
" 어서 해서 배달 가야해요, 바쁘단 말예요. "
" 알았어, 배달은 내가 다녀올께. "
" 당신은 더운데 가만히 앉아서 쉬세요, 내가 다 알아서 할께요. "
" 아냐, 나도 도와야지. "
순간 정재와 아내는 마주보며 웃는다.

새벽 한시가 지나서 가게문을 닫았다.
" 오늘 많이 피곤하지? "
" 아뇨, 당신과 함께 있는데 힘들 게 뭐있어요? "
" 미안해, 고생시켜서... "
" 그런말 하지 말아요. "
" ..... "
" 어서 씻고 오세요. "
정재가 씻고 나오니 아내는 이부자리를 펴 놓고 있었다. 욕실로 들어가는 아내의 뒤에다 대고 정재가 말했다.
" 내가 씻겨줄까? "
" 피이, 됐어요. "
가만이 앉아있으려니 낮에 승용차 문을 열어준 여자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생각하면 할 수록 몸 한 부분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 빨리 안나오고 뭐해? "
" 알았어요, 금방 갈께요. "
아내는 정재의 팔배개를 베고 가슴에 파고들며 행복해한다.
" 여보, 오늘 너무 좋아요. "
" 왜? 좋은 일이라도 있어? "
" 한번 보실래요? "
아내는 통장을 가져와 정재에게 내밀었다.
" 보세요. "
못참겠다는듯 통장을 두 손으로 펴서 내밀자 정재도 두 손으로 받아들고 자세히 본다.
" 우와, 도대체 동그라미가 몇개야? "
" 모두 삼천 오백만원이에요. "
" 이걸 언제 다 모았어? "
" 안쓰고 무조건 저축만 한 보람이 있는거죠. "
" 정말 대단해. "
" 여보... "
: ...... "
" 이거...당신이 보관하세요, 당신 쓰고싶으면 맘대로 쓰세요, 난, 당신만 있으면 되니까... "
" 아냐, 당신이 가지고 있어, 내가 이런 거 가지고 있음 괜히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서 싫어. "
" 당신이 알아서 쓰래두요. "
" 아냐, 나도 당신만 내 곁에 있으면 더이상 바랄 게 없어. "
정재는 아내를 꼭 껴안는다.
" 날 그토록 사랑하는군요. 고마워요. "
" 난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
" 여보... "
" 사랑해... "
정재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아내를 꼬옥 끌어안는다.

다음날 정재는 아내의 통닭집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혜미와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혜미의 자동차 보험이 만기가 다 되어 새로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지금 들고있는거랑 같은 조건으로 해서 견적을 알아봐 주세요, 이왕이면 혜택도 많고 저렴한 걸로 들어야죠. "
" 네, 각 회사마다 다 뽑아서 비교를 해드리겠습니다. "
" 그나저나 전기에다 수도...보험까지 못하시는 게 없고 안하시는 게 없으니 돈도 많이 버시겠네요. "
" 뭐든 나쁜 짓만 아니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죠. "
" 잠깐만 기다리세요. "
혜미가 아내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정재는 보험 중개를 하는 ( 아이원 )에다 전화를 했다.
" 예, 예, 각 회사마다 다 뽑아서 좀 알려주세요. "
전화를 끊고 30분도 채 안되어 ( 아이원 )에서 연락이 왔다.
" 네, 감사합니다. "
정재는 혜미에게 견적이 나온 것을 메모해서 알려주었다.
" 같은 조건인데도 작년보다 훨씬 저렴하네요. "
" 당연하죠, 무사고에 할인이 되어 훨씬 저렴하네요. "
" 고객이 보험 회사에 가서 드는 것 보다 더 적게 나온 것 같네요. "
정재는 그냥 말없이 웃기만 했다.괜히 이러쿵 저러쿵 세세한 부분까지 얘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언제 술 한잔 사야하는 거 아니에요? "
" 다음에 꼭 살께요. "
" 말이 나온김에 날 잡을까요? "
" 좋죠. "
옆에서 닭을 자르며 듣고있던 아내가 언제 혜미와 우리가 쉬는 날을 맞추어서 함께 피서라도 가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한다. 혜미는 좋다고 하며 꼭 같이 가자고 한다.
" 보험 증권은 우편물로 도착 할 것이고요, 입금 영수증과 보험 가입 증권 사본은 이따가 갖다 드릴께요. "
" 예, 천천히 오셔도 돼요. "
혜미에게서 보험료를 받아 은행으로 가서 송금을 하고 ( 아이원 )에다 전화를 했다.
" 예, 이정잽니다. 방금 송금했으니 팩스로 사본 보내주세요, 예, 예, 고맙습니다. "
정재가 가게로 들어서니 혜미가 가입한 보험 증권 사본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 빨리도 도착했네요. "
" 응, 요즘은 스피드 시대니까.. "
" 배 안고파요? "
" 아, 벌써 점심 때가 되었네, 뭘 먹을거야? "
" 오늘은 간단히 시켜먹어요. "
" 알았어, 잠깐만...이거 갖다주고 올께. "
" 예, 빨리 오세요. "
혜미의 지하 노래방으로 들어서니 시원한 에어컨의 냉기가 전해져 왔다.
" 벌써 왔네요,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 "
" 가지고 있으면 뭐 하겠어요, 괜히 짐만 되는데요.. "
" 예? 제가 짐이 된다고요? "
혜미는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넘긴다.
" 혜미씨처럼 이쁜 사람이 짐이 될 순 없죠. "
언제 준비했는지 시원한 오렌지 쥬스에 얼음을 넣어서 내어 온다.
" 말이 필요없군요. "
" 이젠 눈빛 만으로도 알 때가 되지 않았던가요? "
" 하하하, 그럼,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아시겠군요. "
" 당연히 알죠. 하지만, 맘 속에만 담아두는 게 만수무강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네요. "
" 하하..아참, 아직 점심 전이시면 울 가게로 가요, 오늘은 간단한 걸로 시켜서 먹자고 그러네요. "
" 두 분이서 분위기 잡고 드시는데 불청객이 끼면 안되죠. "
" 아뇨, 우린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 아내도 혜미씰 모시고 오라던데요. "
" 정말요? "
정재는 혜미와 함께 그녀의 노래방을 나섰다. 혜미가 재빨리 팔짱을 끼며 안기듯 기대어 온다.
" 요즘 손님은 좀 오나요? "
" 날씨가 더우니까...그래도 냉방 장치가 되어있으니 시원한 맛에 오는 손님들도 있어요. "
" 예... "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침 아내가 주문하려고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 뭘로 드실래요? "
" 시원한 냉면 어때요? "
아내의 제안에 정재와 혜미는 찬성했다.
" 언니! 방금 아저씨랑 팔짱끼고 왔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
" 왜요? 뭐가 어때서요? 보기만 좋은걸요. "
" 이럴 땐 질투를 해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
" 난, 질투같은 건 안해요, 저이를 믿으니까요. "
" 하긴, 아저씬 어디가서 실수를 하실 분이 아니죠. "
혜미가 왠지 알듯말듯한 눈웃음으로 정재를 바라본다. 정재 역시 혜미와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쑥스럽다는 생각에 멋적게 웃었다.

혜미가 이 동네로 이사를 온지도 벌써 3년이 되었다. 3년 전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이유로 시댁 식구들에 의해 쫓겨나듯 이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집안의 성화에 못이겨 혜미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났었고 결국 아이까지 생기자 작당을 하여 혜미를 내쫓았다. 어쩔 수 없이 혜미는 그 여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게 된 것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친 시댁 식구들의 등살에 떠밀리듯 거리로 내몰린 혜미에게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지 그녀의 남편은 5천만원이 든 통장을 혜미의 손에 쥐어 주었고, 그 돈으로 지하 노래방을 인수 받고 남은 돈으로 겨우 아파트에 전세로라도 들어 갈 수가 있게 되었다.
혜미가 이사 온지 3일 째 되던 날, 먼저 살던 사람들이 이사를 가며 배수구 구멍에 아무거나 집어넣으며 막히도록 해놓았던 탓에 물이 잘 빠지질 않아 정재를 부르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정재와도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이다.
첨엔 정재도 혜미의 사정을 몰랐으나 어느날 달력에 표시된 혜미의 생일날을 보고서 그의 아내와 함께 생일상을 차려 주었는데, 너무나 감격한 혜미가 기분 좋게 마신 술에 취해 울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술주정하듯 얘길하는 것을 들어서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혜미는 외로움을 잘 타고 장난치듯 은근히 정재를 유혹하며 접근하곤 했었다. 아무런 스스럼없이 믿고 따르는 혜미가 좋았기에 정재도 그녀가 싫진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 감정을 억제하며 나름대로 거리를 두었다.
이젠 남자를 만나지도 않을 것이고 평생 혼자 살 것이라지만, 정재에겐 예외인 것 같았다. 정재의 아내가 있는 앞에서도 이 세상 남자들이 다 싫지만, 정재만은 미워하거나 싫어할 수가 없다며 은근히 유혹의 눈길을 보낸 적도 있었다. 지금은 자주 듣던 말이라 정재의 아내도 그러려니 하며 웃어 넘긴다.

정재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휴대폰의 신호가 울렸다. 아내는 닭을 자르고 있었고 혜미가 받았다. 자동차의 미등이 켜진 것도 모른채 오랜 시간 방치를 해둬서 밧데리가 방전이 되었다는 연락이다.
화장실에 다녀 온 정재가 서둘러 준비하고 나가려니 혜미도 같이 가자며 따라 나선다. 정재가 도착해서 보니 주차해 놓은 차들이 많은데 비상용 충전 코드를 싣고 다니는 차는 한대도 없었다.
트렁크에서 충전 코드를 꺼내어 정재가 타고온 차에다 연결하고 시동을 켜니 방전 되었던 차에도 금새 시동이 걸린다.
" 이 상태로 30분간은 계속 시동을 켜두셔야 합니다. "
" 예, 수고하셨어요,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
" 이까짓 걸로 돈을 받기는 뭣하지만 저도 전화를 받고 먼거리를 왔으니 그냥 담뱃값 정도만 알아서 주세요. "
운전자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만원을 준다. 돌아오는 길에 혜미는 가게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그런 말을 했느냐며 묻는다. 이런 일은 그렇게 해서 돈을 버는거라고 설명을 해줘야 혜미가 이해를 할 수가 있었다.
길 옆 한적한 곳에 삼륜차 형식의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고 그 뒤에서 좌판을 벌여놓은 노부부가 눈에 뛴다. 정재는 그 옆에 차를 세웠다. 나프타린 한 봉지와 70개들이 대일 밴드 한통을 집어 들었다.
" 얼마예요? "
" 예, 이천원이오. "
" 저 빗도 두개 주세요. "
" 그건 하나에 천원씩하는 건데 두개 천원 해드릴께요. "
" 아, 예, 고맙습니다. "
" 얼마 전에도 사오시는 것 같더니 왜 또 사세요? "
" 없는 사람들끼리는 이렇게라도 서로 돕고 살아야죠, 이 빗 하나는 혜미씨가 쓰세요. "
정재는 장난스럽게 혜미의 머리를 빗기며 빗을 건넨다.
" 빗이 참 이쁘네요. "
" 제가 워낙에 한 인물 하거든요. "
" 맞는 말이에요. "
두 사람은 시선이 마주치자 잠시 할말을 잊은 듯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웃는다.
" 저기...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에요? 저 분들이 계속 보잖아요. "
노부부가 우릴보며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정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고 차를 몰았다.
" 우리 이렇게 해요. "
" 예...?? "
" 저의 가게에 까지 가는 동안에 연락이 오면 가시고, 안그럼 저랑 30분만 함께 있어주세요. "
무슨 의도로 그러는 건지 짐작이 가지만 거절을 할 이유가 없었다.
" 좋아요, 그렇게 해요. "
혜미는 어린 아이처럼 마냥 신이나서 좋아한다. 결국 정재를 찾는 호출이 있었고, 혜미는 그녀의 노래방 입구에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려야만 했다.

"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
" 어서오세요, 많이 바쁘신가 봐요? "
" 예, 조금 바쁘네요. "
" 급탕을 눌렀더니 물은 뜨신데 계속 녹물만 나오는군요. "
" 아, 예.. 공기가 차서 그런겁니다. "
" 기름집에 전화를 하면 다 봐주는데 대놓고 쓰는 기름집에 전화를 했더니 오늘은 바빠서 도저히 올 수가 없다고 그러네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연락을 드렸어요. "
" 잘 하셨습니다. "
정재는 기름 찌꺼기 거름망을 풀어서 안쪽의 찌꺼기를 비우고 에어빼기 밸브를 돌려 공기를 빼고 돌려서 잠구었다. 내친김에 연통까지 뜯어 그을음 청소까지 다 해주었다.
사실, 왠만한 가정집에 그을음이 날리는 보일러용 기름보다는 대부분 석유를 사용하므로 그을음이 많이 나올리는 없었다. 어차피 공기를 빼건 연통 청소를 하건 이런 것은 석유집에서 서비스로 다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정재로선 ' 나 '라는 사람이 매사에 이렇게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고, 일부러 거름망을 풀면서 손에다 기름을 묻혔던 것이다.
" 이젠 다 되었습니다. "
" 아이쿠, 바쁘신데 일부러 와서 고쳐주시고...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
주인은 정재의 손에 3만원을 쥐어 주었다.
" 이러시면 안됩니다. 돈받고 올려고 했던 게 아닌데..."
" 아뇨, 그냥 받아두세요, 매번 급할 때마다 불러서 힘든 일만 시키고 대접도 제대로 못해드렸는데...아무말 마시고 받아두세요. "
" 허허, 참내... "
" 성의니까 그냥 받아두시고 다음에도 잘 좀 봐주세요. "
" 그럼, 고맙게 받겠습니다. "

정재는 아내의 가게로 가기 전 혜미에게 잠깐 들러기로 마음 먹었다. 오늘은 혜미와 많은 얘길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일마치고 가는 길에 혜미의 가게에 들렀다 갈거라고 했다.
지금 시간에는 아르바이트 생을 시켜 배달을 하면 되는 것이고 정재는 밤에 배달을 하면 된다고 통밥을 재었다.
정재가 지하 노래방으로 들어서자 안올줄 알고 풀이 죽어있던 혜미가 정재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이한다.
" 못 오실 줄 알았는데..."
" 예, 저 밑에 동네에서 보일러를 점검하다 보니 빨리 끝났어요. "
정재가 기름 뭍은 손을 씻고 나오자 혜미는 시원한 냉커피에 얼음을 넣어서 긴 스푼으로 젓고 있었다. 일부러 혜미 옆에 앉았다.
" 어서 오세요, 어머, 이 땀 좀 봐..."
혜미는 수건으로 정재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준다. 정재는 수건의 다른 한쪽으로 손을 닦았다.
" 손님은 좀 있어요? "
" 아뇨, 어두워지면 오려는지...지금은 더워서 안오는 것 같네요. "
" 더운데 어서 드세요. "
정재는 혜미가 건네주는 냉커피를 받아 마신다.
" 혜미씨!..."
" 예? "
정재는 혜미의 두 손을 감싸쥐며 얼굴을 쳐다본다. 혜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며 그녀의 손을 감싸쥔 정재의 손을 보고있다.
" 날.. 어떻게 생각하세요? "
" 예? "
"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
" 잘 아시잖아요, 세상 남자는 다 미워하고 싫어해도 아저씨만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 날 좋아하나요? "
" 네, 아주 많이..."
" 나도 혜미씰 좋아해요, 아니, 어쩜 혜미씨가 날 좋아하는 것 보다도 더 혜미씰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
" 어머나..."
혜미는 정재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에 감격해 하는 것 같았다.
" 난, 난...정말이지 혜미씰 사랑해요, 하지만, 내 아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 예, 잘 알아요. "
" 내 아내는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살고 있어요. 나는 혜미씨가 좋아하는 그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고요..."
" 아뇨, 저를 좋아하신다는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
" 난, 지금까지 혜미씨를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혜미씨가 원한다면 친구로써, 때로는 애인처럼 지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을 해봤어요. "
" 그렇게 못 지낼 이유는 없잖아요,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지..."
" 약속할께요, 혜미씨가 외로울 땐 언제든 함께 있을께요. "
" 정말요? 정말 그래 주실거죠? "
" 약속할께요. "
" 혜미씨! 난, 말이에요, 조그마한 꿈이 있어요. "
" 무슨...?? "
" 언젠가 기회가 되고 여유가 되면 아내와 함께 시골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전원 생활을 할거에요. 물론, 아내도 같은 생각이고요. "
" 저...저도 함께 가면 안될까요? "
" 혜미씨도 가고 싶어요? "
" 네, 가고싶어요. "
" 그럼, 같이 가요. "
" 정말 데려가 주시는 거죠? 정말요? "
" 네, 혜미씨 마음만 변하지 않는다면요..."
" 고마워요. "
혜미는 정재의 품에 안기며 바짝 다가 앉는다.
" 한가지만 부탁할께요. "
" 예? 뭐든 말씀만 하세요. "
" 혜미씨와 나 때문에 내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
" 그 말은..."
" 나도 혜미씰 사랑하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거죠. "
" 그럼...? "
" 그렇게 급할 건 없잖아요, 하지만, 오늘 우리가 한 얘기는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요.알았죠? "
" 예, 비밀...꼭 지킬께요. "
정재는 혜미를 힘껏 끌어안으며 키스를 했다. 간절히 원하는 혜미의 눈길에서 정재는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뿌리쳐야 했다.
" 왜요? "
" 안돼요. "
" 하지만...아저씨도 날 원하잖아요? "
" 그래도 참아야 해요. "
" 이렇게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
안타까운듯 혜미의 손길이 정재의 부풀어 오른 부분을 만지작 거린다.
" 혜미씨! "
" ..... "
" 시원한 쥬스 한잔만 가지고 오세요, 부탁할께요. "
혜미는 정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 어서...요..."
" 네... "
혜미는 조용히 일어나서 정재가 시키는대로 쥬스에 얼음을 채워서 가지고 왔다.
" 우리 시원한 쥬스를 마시고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요. "
" 피이..."
차가운 쥬스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달아오른 피가 차츰 냉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혜미의 눈에선 이번이 기회인데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하소연 하듯 무언의 눈빛으로 간절히 호소하는 것만 같다.
" 이리로 가까이 와요. "
정재는 쥬스를 한모금 입에 물고 혜미의 입술에 입을 대고 천천히 흘려 넣었다.
" 어때요? "
" 좋아요. "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 혜미씨 가게에 손님은 좀 있어요? "
" 이제 첫 손님이 들어오는 걸 보고 왔어, 봐가면서 손님이 없으면 일찍 문닫고 우리 가게로 오라고 했어. "
" 잘 했어요. "
" 여보..."
" 왜요? "
" 아냐...나중에 얘기할께. "
" 알았어요. "
" 오늘은 어땠어? "
" 보시다시피 한 손님 왔다가면 또 오고...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네요. "
" 많이 힘들지? "
" 당신도 참...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
" 미안해..."
" 오늘따라 왜 이래요? 도대체..."
" 나중에 얘기해줄께. "
" 알았어요. "
서너명의 손님이 들어왔고 손님이 주문한 메뉴를 아내가 준비하는 동안 정재는 통닭을 들고 왔다.
" 양념 한 마리에 후라이드 한 마리 시키셨죠? "
" 네, 만이천원 여기 있어요. "
" 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
돌아서 나오려는데 현관 앞의 백열 전구가 깜빡이는 게 영 눈에 거슬린다.
" 불이 왜그래요? "
" 아, 전구가 수명이 다 된 것 같은데 새걸 사 온다는 게 깜빡했어요. "
" 혹시, 사다리 있으세요? "
" 네, 있긴 있습니다만..."
" 어서 가져 와 보세요. "
정재는 사다리를 펼치고 현관 위의 전등 케이스를 드라이브로 열었다. 백열 전구를 살짜기 만져보니 역시나 흔들거린다. 전구를 잡고 꼭 돌려서 바르게 꽂으니 금새 불이 켜진다.
" 아니, 어떻게 된 거에요? "
" 전구 다마가 헐렁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젠 괜찮습니다. "
" 하아...그것참..."

정재는 2층 건물의 페인트 도색일을 맡아서 6일째 하고 있었다. 첫날은 너덜너덜 일어나는 페인트를 벗겨내고 벽면의 금이 간 부분을 끌칼로 긁어 내었다.
둘째날엔 금이 간 벽면에 방수액을 바르고 옥상 바닥을 긁어내어 시멘트와 방수액을 섞어서 개어 두껍게 발랐다.
셋째날에는 옥상 바닥을 말리느라 1, 2층 내부에 거미줄을 제거하고 물걸레로
나무로 된 부분들을 닦았다.
넷째날이 되자 페인트 칠을 했다. 한번 바르고 돌아서서 다시 한번 더 바르고...두, 세번씩 페인트 칠을 해야만 페인트가 제대로 발라지는 것이다. 인부를 쓰질 않고 혼자서 일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일이 더딜 수 밖에 없지만, 정재를 잘 아는 건물 주인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꼼꼼히 잘 해주는 정재가 미더워 정재에게 일을 맡기게 된 것이다.
혼자서 이틀간 페인트 칠을 완벽하게 해내고 마지막 여섯째 날엔 내부에 니스칠을 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모든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건물 주인은 정재가 해놓은 일이 매우 흡족한 모양이다. 저녁이라도 산다면서 붙잡는 걸 정재는 한사코 거절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가게에 들렀다.
" 이제 오세요? 늦었네요. "
" 응, 방금 다 끝마쳤어. "
" 예..수고했어요. "
" 난, 집에 가서 씻고 올께. "
" 아뇨, 오시지 않아도 돼요. "
" 아냐, 얼른 씻고 올께. "
" 알았어요. "

정재는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으며 서 있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온 몸에 와 닿으니 살 것 같았다. 긴 타올로 비누칠을 해서 몸을 씻었다. 욕조에 물이 어느정도 차오르자 욕조로 들어가 앉았다. 온 몸이 나른한 게 이대로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어느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득한 잠의 나래로 한없이 빠져드는 것만 같아 찬물을 끼얹고 서둘러 나왔다.
" 저녁은 먹었어? "
" 아뇨, 아직..."
" 왜? 먼저 먹지...? "
"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
" 배 많이 고프겠다. "
" 괜찮아요, 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하실텐데 왜 나왔어요? "
" 당신이 나 보다도 더 고생하는데 당신을 놔두고 혼자서 쉴 수는 없잖아. "
" 고마워요..."
" 우리 사이에 고맙긴...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야.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정재가 설겆이를 하는 동안에 그의 아내는 커피를 준비했다. 땀을 많이 흘리는 정재를 위해 각 얼음을 넣어 냉커피를 만드는 것이다.
" 허어...커피가 아주 시원한데..."
" 오늘은 일찍 마쳐요. "
" 왜? "
" 당신도 피곤하실테고 일찍 쉬고 싶어요. "
아내가 정재를 위해 하는 말인 줄을 정재는 알 수 있었다.
" 난, 괜찮은데..."
" 일찍 마치고 혜미 가게로 가요. "
" 왜? "
" 모처럼 셋이서 함 뭉쳐요. "
" 당신도 참..."
다른 날 보다 일찍 가게 문을 닫았다. 정재는 아내의 손목을 잡고 가까이 당기며 자신의 팔에 걸었다. 아내는 말없이 웃었다.
" 당신은 이렇게 웃을 때가 얼마나 이쁜지 몰라. "
" 정말요? "
" 그럼, 정말이야. "
웃는 모습이 이쁘다는 말에 아내는 기분이 좋다. 정재가 먼저 혜미의 지하 노래방에 들어서니 두, 세명의 사내들이 혜미를 둘러싸고 위협하고 있었다.
정재는 얼른 아내를 밖으로 내 보냈다. 그의 아내는 서둘러 뛰쳐나오며 112에 신고를 했다.
한 명의 남자는 혜미의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채 칼을 들이대고 있었고 다른 한명은 가슴 주무르고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카운터에서 무언가 열심히 뒤지는 걸로 봐선 사내들도 여기에 들어온지가 얼마되지 않은듯 했다.
" 뭐야? "
카운트를 뒤지던 사내가 정재의 갑작스런 출현에 깜짝 놀라 소리친다.
" 뭐긴 뭐야, 그 사람 남편이지. "
" 뭐..? "
" 그 더러운 손 치우지 못해? "
" 이새끼 봐라.."
카운터를 뒤지던 사내가 각목을 들고 정재쪽으로 다가온다. 정재가 혜미쪽을 보니 혜미는 잔뜩 겁에 질려 떨고 있었고, 혜미의 앞에서 가슴을 만지던 사내는 정재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이 계속 혜미의 젖혀진 브래지어 속으로 가슴을 주무른다.
" 이새끼, 오늘이 니 제삿날인 줄 알아라. "
" 그래, 어서 와라. "
사내가 휘두르는 각목을 요리조리 피하던 정재가 어느순간 느려지는 사내의 몸 동작에 재빨리 사내의 급소을 걷어찼다.
" 윽 "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사내는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앞으로 거꾸러 진다. 그 순간, 정재는 쓰러지는 사내에게 달려가 턱을 향해 힘차게 발길질을 했다.
" 크윽 "
혜미의 가슴을 만지던 사내가 칼을 든 사내에게서 칼을 배앗더니 정재에게 달려든다.
" 이새끼가 정말..."
" ..... "
사내는 원을 그리면서 정재의 얼굴을 향해 칼을 휘둘렀고, 정재는 사내와의 거리를 좁히며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하며 잘도 피했다.
사내가 정재의 복부를 향해 칼을 찌르는 순간, 거의 본능적으로 정재는 태권도의 낭심막기 동작(왼발 앞굽이로 주먹진 두손을 교차)으로 사내의 칼을 막아내며 순식간에 칼을 든 사내에게서 팔을 돌리듯 사내의 팔을 꺾어 칼을 빼앗는 것과 동시에 엎드리는 사내의 뒷덜미를 오른 발 뒷꿈치로 내리 찎었다.
사내가 엎어지며 쓰러지자 재빨리 사내의 목을 향해 칼을 들이밀었다. 칼이 넘어진 사내의 목을 스치며 붉은 줄이 그어지면서 길게 피가 맺혔다.
워낙에 순식간의 일이라 넘어진 사내는 자신이 꿈을 꾸고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처럼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쓰러져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혜미의 가슴을 만진 사내이기에 더욱 용서 할 수가 없었다. 마음같아선 영원히 눈뜨고 다니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었지만, 이 정도로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 정도야 정당방위로 얼마든지 빠져나올 구멍이 되는 것이다.
혜미의 등뒤에서 그녀를 위협하던 사내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듯 혜미를 방패막이로 삼아 뒷걸음질을 치더니 순순히 무릎을 꿇고 앉는다.
" 몰라뵈었습니다, 형님! "
" 내가 어째서 네 놈의 형님이야? "
"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요. "
무릎 꿇은 사내가 고개를 떨구자 쓰러져 있던 두 명의 사내들이 재빨리 일어나더니 그 사내의 옆에 나란히 꿇어 앉는다.
" 잘못했습니다. 형님! "
두 명의 사내는 합창이라도 하듯 정재에게 용서를 빌었다.
"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 게 아니라 우리 마누라한테 용서를 빌어야지. "
"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
아직도 겁에 질린 혜미는 옷을 고쳐 입으며 어쩔 줄을 모른다. 그때 인근을 순찰 중이던 관할 경찰서의 대원들이 들이닥쳤다.
" 수고 많으십니다. "
정재를 알아 본 경찰관 한 명이 거수 경례로 정재에게 인사한다. 한 경찰관이 혜미에게 다가가,
" 어디 다치신데는 없으십니까? "
" 아뇨, 다친데는 없어요..."
" 어허...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거야? "
" 오늘 이쯤에서 끝나길 천만 다행이지 안그럼 줄초상을 치를 뻔 했어, 지난 번에 붙잡힌 놈들은 목뼈가 부러져서 나갔었지? "
" 3개월은 입원 할줄 알았는데, 5개월 있다가 들어가더라구요. "
이 말을 들은 사내들은 더욱 겁을먹고 몸을 움추린다.
" 정말 괜찮으세요? "
" 네....."
정재의 아내가 몇사람과 함께 내부를 정리하고 청소를 하는 동안에 혜미는 피해자의 신분으로, 정재는 목격자의 신분으로 조서를 꾸미는 데 협조를 하고 함께 경찰서를 나왔다.
" 오늘 정말 대단하시데요. "
" 그래, 다친 곳은 없어? "
" 응... 때마침 와주어서...괜찮아요. "
" 그 놈들 나 보다도 먼저 혜미를 만지다니... 괘씸한 놈들..."
" 호호호...그게 그렇게 분해요? 그럼, 지금이라도 어때요? "
" 하하하..."
정재는 살며시 혜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혜미도 정재의 허리를 안으며 걸었다.
" 정말 큰일 날뻔 했어. "
" 번번히 신세를 지고...고마워요..."
" 이런 일로 고맙다고 하는 게 아냐. "
" 근데, 아깐 정말 대단했어요. "
혜미와 노래방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청소를 끝내어 놓고 있었다.
" 괜찮아? "
" 응, 언니..."
" 오늘 아저씨 정말 대단했었어. "
" 나도 얘길 들었어, 이이가 공수부대 나왔잖아. "
" 예에? 정말...? "
" 맞대두 안믿네...지난 번에도 강도를 몇 번 잡아서 아까온 경찰들도 다 알잖아. "
" 울 아저씨 정말 대단하다..."
" 그나저나 오늘은 일찍 마치고 혜미랑 놀려고 왔는데 이렇게 되어서 어떡해? "
" 난 괜찮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뭐..."
" 그러지 말고 울 집으로 가자. "
" 오늘 기념일이나 뭐, 특별한 날 아냐? "
" 아니야, 혜미랑 같이 있고싶어 왔다니까..."
" 그래, 알았어. 언니! "
" 뭘 사갈까? "
" 아냐, 아무 것도 필요없어. 이이가 다 알아서 준비할거야. "
" 뭘...? "
" 혜미는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돼. "
" 정말 기대가 되는데..."
아내와 혜미는 커피를 마시며 오늘 밤에 있었던 얘기를 하고 있었고, 정재는 주방에서 부지런히 요리를 하고 있다.
" 뭐지? 냄새가 좋다, 언니! 뭐야? "
혜미는 부엌을 가리키며 정재가 뭘 하는지를 물었다.
" 그냥 기다려봐, 나도 뭘 하는지 궁금해도 주방쪽으론 안가잖아. "
" 아참.. 언니! 앨범 좀 내어 와봐. "
" 아저씨랑 언니 사진이 보고싶어. "
" 응, 잠시만..."
아내는 일어나 앨범을 가지러 가고 혜미는 빈 커피잔을 가지고 와서 내려놓으며 정재 곁으로 간다. 정재의 볼에다 가볍게 뽀뽀를 했다.
" 잘 마셨어요. "
" 이렇게 뽀뽀를 해줄 것 같으면 커피를 자주 타줄께. "
" 우와...냄새가 좋더니 장어 아냐? 언제 이런 걸 준비했지? 정말 맛있겠다."
" 허허허..이제서야 본 모양이구나. 잠시만 기다려, 다 되어가니까..."
" 지난 번에도 셋이서 먹을 때 다 만들어 놓은 건줄 알았었는데...아저씨가 직접 만든거였구나. "
" 응, 이이가 못하는 게 없어, 요리도 나보다도 더 잘해. "
아내가 앨범을 안고 와서 내려놓으며 얘길한다.
" 어서와. "
" 응, 언니! "
" 남자들 힘쓰는 장어까지 준비를 해놓은 걸 보니 오늘 아무래도...무슨 날인 것 같아...솔직히 말해. "
" 아냐, 무슨 날은..."
" 언니가 얘길 안하면 아저씨한테 물어볼까? "
" 물어봐도 모를걸, 아무 날도 아니니까..."
" 치...그래도 장어를 먹으면 힘을 쓰야 하잖아. "
" 얘는...장어 먹는다고 그때마다 다 힘을 쓰야 하나..."
" 아저씨! 오늘 밤 울 언니 많이 사랑해줘야해, 알았지? "
" 응, 하하하..."
" 언니! 들었지? "
" 만약 오늘 밤에 그냥 잔다면 아저씬 내일 나한테 힘 좀 써야할걸...내가 잘 지켜봐야지..."
" 하하하..."
혜미의 말에 셋이서 동시에 웃었다.
" 이게 아저씨 공수 부대 있을 때 사진이야? "
" 응 "
" 이건 뭐야? "
" 저이가 군대에 오래 있었잖아. 부대도 많이 옮겨 다녔거든. "
" 아...그랬구나. "
" 언니하고 같이 찍은 사진은 별로 없네. "
" 응, 같이 놀러갈 시간도 없었고, 사진을 찍어줄 사람도 없었거든. 이젠 혜미가 찍어줘야지. "
" 응, 언제 우리 놀러가자. "
" 그래, "
" 자, 그만들 얘기하고 어서 이리로 와. "
언제 준비를 다했는지 식탁이 꽉 찼다.
" 벌써 다 되었어요? "
" 응, 어서와. "
" 우와... 없는 게 없어, 장어만 굽는 줄 알았는데 언제 다 준비했어? "
정재가 냉장고에 가더니 병맥주와 포도주를 가지고 온다. 뚜껑을 따고 혜미에게 한잔 따뤄준다.
" 언니부터... "
" 아냐, 언니는 이걸 먹을거야. "
" 왜? 사람 차별하는거야? "
" 차별은 무슨...언닌 좀 있다 할 일이 있어. "
" 뭘 하는데...? "
" 니가 그랬잖아, 오늘 밤 언니를 많이 사랑해주라고. "
" 아..그거였구나, 근데...맥주와 포도주의 차이는 뭐지? "
" 맥주를 마시고 뽀뽀를 하면 트림이 나오거나 술 냄새가 나지만, 포도주는 아무래도 신선하고 감미로운 그...뭣이 있잖아. 하하하..."
" 치..그런 게 어딨어..."
" 나도 포도주 먹을 거야. 먹을 땐 같이 먹어야지. "
" 맞아... 혜미에게도 한잔 줘요. "
" 알았어. "
" 근데...집에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같은 걸 아저씨 혼자서 다 하는거야? "
" 응, 난 손도 못대게 해. "
" 나한테 반만이라도 좀 해주지...."
" 하하하..."
정재와 아내는 마주보며 또 웃었다.
" 장어가 정말 맛있어. "
" 오늘 혜미 많이 놀랬지? "
" 응, 아직도 심장이 쿵덕쿵덕 뛰고있어. "
" 여자 혼자 있다고 별별 놈들이 다 치근덕거리니 앞으로도 더욱 조심해야 할거야. "
" 응...솔직히 이젠 겁이나서 노래방도 못하겠어."
" 차라리 다른 걸 하지 그래? "
"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어. 언니..."
" 아직은 급한 게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도 되잖아. "
" 응, 일단 가게부터 내놔야 하니까..."
" 참, 가게가 나가야 뭘하든 하지.."
" 혜민, 뭘 하고싶어? "
" 몰라, 아저씬 내가 뭘했음 좋겠어? "
" 나도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
" 참나..아저씬..."
" 왜? "
" 아저씬 정말 혜미에게 관심이 없나보다. "
" 관심이 없긴...나도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하고있어. "
" 그럼, 뭐야? 도대체..."
" 내 생각엔 당분간 쉬면서 천천히 생각을 해보면 좋겠어. "
" 치..그런 말은 누가 못해...그럼, 그동안 뭘 먹고 사냐고?"
" 나 혼자만의 생각인데...이 참에 집도 내어놓고 여기 들어와서 살면 어떨까 싶어. "
" 에이...그런 게 어딨어? "
" 평소에 많이 생각해보는데...오늘 일도 있고 하니까...아직 이 사람과는 의논도 못해봤지만..."
정재는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끄낸다.
" 당신이 그동안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내린 결정이라면 무슨 대책이 있겠지요, 지금 이 자리에서 다 모였을 때 의논을 해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 응, 어서 얘길해봐요, 아저씨..."
" 혜미가 정말 가게를 그만 둘 생각이라면, 내일이라도 당장 내가 나서서 가게를 내어놓도록 할께, 절대 손해가 가질 않도록 계약을 잘 하도록 해줄께. "
" 그리고 그 다음엔...? "
" 그 다음엔 집을 내어놓는 거지. "
" ..... "
" 어차피 혜민 혼자이고 울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니까, 차라리 집하고 가게를 내어놓고 우리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사자인 혜미와 당신이 결정을 해야할 문제이지만..."
" 괜히 눈치보면서 얘기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하자는대로 따라 할테니까요. "
" 우와..울 언니 정말 화끈하다. "
" 지금은 감정에 치우쳐져서 이런저런 말들을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빨고 살 순 없잖아요. "
" 그것도 생각을 안해본 게 아니야, 직장엘 다니거나 내 장사를 하더라도 많이 벌고 적게 버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먹고 사는덴 크게 문제가 되는게 없을 것 같아. "
" 어떻게요? "
" 많이 벌면 많이 쓰이고 적게 벌면 적게 쓰이지만,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 매고 살아가면 설마 굶기야 하겠어? "
" 아직 구체적인 생각은 안해봤어, 지금으로선 당신이 하고 있는 가게도 그런대로 되는 편이고, 나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으니...만약, 당신이 지금 하는 장사가 잘 안되면 그때에 가서 지금처럼 다시 의논을 해보고 업종을 바꾸던지 하면 되잖아. "
" 혜미는 어떡해요? "
" 때때로 당신을 도우며 당신과 함께 가게에 나가기도 하고, 나하고 함께 다니면서 머리도 식힐겸 바람도 쐬고 하면 좋을 것 같은데..."
" 와우, 정말...? "
" 내가 할 말은 다했고 지금부터 결정은 혜미하고 당신이 하도록해. "
" 문제와 답을 혼자서 다 풀어놓고 나보고 뭘 해라는 건지..."
혜미가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하나요? "
" 아니...아직 시간은 많잖아. "
" 피...예스나 노우나 한마디만 하면 될 걸 가지고..."
" 혜미는 어때? "
" 나야 언니만 찬성하면 좋은거지, 뭐..."
" ..... "
갑작스런 정재의 제의에 분위기가 어두워서인지 정작 말을 끄낸 정재는 고개를 숙이고 방바닥만 내려다 보고있다.
" 그럼...그렇게 해. "
" 앗싸...언니! 고마워. "
" 아니, 얘가..."
혜미는 뛸듯히 기뻐하며 아내를 껴안고 볼에다 뽀뽀를 한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텐데 이처럼 쉽게 결정을 하는 아내가 더더욱 사랑스러워 정재는 말없이 웃으며 아내를 바라본다.
아내는 어두운 표정은 아니지만, 정재를 위해 웃어 보인다. 이런 아내가 정재는 한 없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 아참, 언니.."
" 왜? "
" 내가 아저씨랑 함께 다녀도 돼? "
" 왜? 그것도 허락을 받을려구? "
" 아니...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언니가 안된다면 나도 안가려고..."
"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말고 같이 다니도록 해. "
" 우와...정말? 호호호...이젠 아저씬 내꺼야. "
" 무슨 말이야? "
" 내가 아저씰 주간에만 사용하기로 접수했어, 언니! 곱게 쓰고 돌려줄께. "
" 하하하..."
세 사람은 동시에 소리내어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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